풀이 무성히 자란 땅 가까이 얼굴을 대고 마치 작은 벌레가 된 듯 풀을 바라보면 내가 생각 없이 거닐던 자리에 또 다른 세계가 있는 듯 하다.
아주 연약해 보이던 풀이 마치 나무처럼, 작은 모래알이 돌멩이처럼 느껴지는 순간 이곳엔 이들만의 시간이 흐른다.
가끔은 그 자유로운 세계에 속하고 싶다.
        
나의 세계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척 하면서도 은근히 '이렇게 사는 삶이 최선의 삶'이라 말하는 듯 하다.
그 모순 속에서 불안을 느낀다.
각자의 시간과 길이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기에 우린 결국 주류라는 이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스스로의 가치를 끝없이 비교하고 깎아내리던 순간, 보이지 않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나를 잃어가던 그때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나를 뒤덮은 모순 속에서 그 기준과 시간을 넘어선 자유를 본다.
이름 불리지 않아도 당당히 살아가는 잡초를 본다.
사실 '잡초'라는 것은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이이 그것을 훼방꾼이라 여기면 '잡초'가 되고, 반대로 가치를 인정받아 '식물'이 되기도 한다.
결국 그것이 잡초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
누군가에게 쓸모없고 무가치한 존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평안과 자유의 대상이 된다.

내 세계 안에선 그들이 주류다.
그들은 화면 속에서 자유로이 얽히고 흐른다.
주인공도, 중심도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어우러지며 스스로의 자리에서 당당히.
이 세계에서 비주류로 남는다는 것은 결코 고독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연결을 위한 또 다른 방식일 뿐.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선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우리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들판을, 보통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그린다.
어쩌면 무가치한 것들을 가까이 바라보며 우리를 떠올린다.
저 들판의 잡초처럼 우린 서로 다른 모습으로 얽히고설키며 살아간다.
다르고, 낯설고, 이질적인 개인들이 평안히 서로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길, 그 과정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는 힘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의문]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오는 것에 대한 의문.
                    
우리는 왜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는 것인가.
월세도 비싸고, 밥 값도 비싸고, 사람도 많고, 공기도 안 좋고, 가족도 없는 이곳에 왜 다들 미쳐있는가.
    (지방의 도시가 가지지 못한 것들은 여전히 많다.)
            (->이 격차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오고자 한다.(했다.)
서울은 수많은 지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서울을 새로이 구성한다.(했다.)


그렇다면 '진짜' 서울은 뭘까? 진짜가 있기는 한가?


서울 속에는 대도시, 소도시, 새 도시, 낡은 도시가 공존한다.

어쩌면, 서울은 모든 것을 가졌다. 

우리는 서울에서 고향을 떠올린다.
길에서 마주한 서울의 풍경 속에서 고향의 어느 곳을 떠올린다.

서울에서 고향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는 뭘까?
그걸 찾으면 서울에서 거의 모든 지역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우연히 마주친 건물, 간판, 도로, 나무, 아파트, 그것들이 모인 풍경에서 고향을 느낀다.
                 +)좀 더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것들

서울은 지방의 도시와 닮아있다.
지방의 도시는 서울과 닮아있다.